• SNS시대의 음악 비평
  • 업계에서 일하는 평론가와 달리 애호가는 대체로 자기 돈을 내고 표를 사서 음악회에 가는 입장이고 업계에 몸을 담지 않은 사람이 주축이다. 자연히 호평이든 혹평이든 자기 감상을 솔직히 말하는 데 거리낄 게 적다.

 

평론 불신의 시대
수원시향의 김대진 예술감독이 사표를 냈다는 소식을 접하니 마음이 무겁다. 기사에 따르면 그동안 누적된 갈등이 지난달 5일 음악회의 혹평으로 폭발한 건데 그때 나 또한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꽤 세게 불만을 토로했기 때문이다.

여하간 이런저런 혹평을 접한 감독이 단원들을 강하게 질책했고 단원들은 감독이 책임을 미룬다고 반발하며 사달이 난 모양이다. 끝내 감독은 사표를 제출했고 단원들은 사임 찬반 투표에 93명이 참석해 77명이 찬성했다. 물론 오케스트라에서 지휘자와 연주자 간의 갈등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번 건 역시 그동안 쌓이고 쌓인 무언가가 음악회 혹평을 계기로 터진 것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그 계기가 음악회 혹평이라는 점은 못내 씁쓸하다. 비평, 평론, 감상평 등은 예술상품의 공급자와 수요자가 서로 소통하고 교류하는 경로니까. 순수예술로 분류되는 장르라면 더욱 그렇다. 아무래도 그런 일련의 큐레이션 과정을 거쳐 성장하는 성격이 강하다. 질적으로든 양적으로든

 

해서 이 글에선 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그동안 우리나라 음악계에는 혹평이 거의 없었다. 비평은 신문, 잡지 등의 공적 매체를 통해서 이뤄졌고 그 필진은 소위 ‘주례사 비평’을 기계적으로 양산했다. 청탁받고 쓰는 주례사처럼 좋은 말만 써줬단 소리다. 이는 크게 두 가지 이유로 분석된다. 한국 특유의 학연, 지연이 강력한 제약을 가한 것이 첫째이고, 어떻게든 그 바닥에서 밥벌이를 해야 하는 입장에선 입바른 소리를 하기 어렵다는 것이 둘째다.


어찌 보면 둘 다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람’이 전제된 같은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이는 결국 ‘평론불신’ 현상을 야기했다. 아래는 내가 2013년 초에 쓴 글의 일부다. 제목은 <지금 이 순간 한국의 음악평론을 비평한다>이고 그해 객석예술평론상 최종후보에 오른 바 있다. 수상을 못하며 사장된 글이지만 지금 내용과 교점이 있기에 옮긴다.

 

“내 모교인 연세대학교 음악대학의 여러 후배에게 질문을 던져봤다. “전공자는 대중예술지의 평론을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질문의 요지였다. 좀 더 폭넓고 공정한 의견 수렴을 위해 작곡가, 성악과, 기악과, 교회음악과 등에 고루 물어봤고 저학년, 고학년, 졸업생 등으로 세분화했다.

그러자 하나의 경향이 관찰됐는데 공부한 기간이 길수록 회의적인 시각을 강하게 피력했다는 것이다. 저학년의 일부가 “보통 사람들이 연예잡지 보듯이 본다. 입시생 시절부터 콩쿠르 등의 정보를 얻으려고 참고해왔다”고 말한 반면 고학년과 졸업생은 하나같이 “아예 안 본다. 음악계 내에서 실질적으로 통용되는 평과 너무 달라서 참고할 가치가 없다”며 입을 모았다. 도움이 되고 신뢰할 수 있다고 말한 고학년은 단 한 명도 없었으며 회의적 시각은 학과에 관계없이 모두 만연해 있었다.

음악의 숙련도 및 실제 음악계와 맺고 있는 연의 깊이 등을 감안해 고학년의 시각을 음악계 전반의 견해로 간주하면 음악계에 ‘평론불신’이 뿌리깊이 자리 잡은 상황으로 진단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해 양적으로 잔뜩 위축된 음악평론이 질적으로도 결코 높은 수준에 있지 않단 뜻이다. 음악계 틈새 곳곳에서 윤활유 역할을 해야 할 평론이 제 역할은 고사하고 존재가치조차 의심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렇듯 음악계에 몸담은 사람조차 평론을 신뢰하지 않는 현상이 만연했다. 그러나 이를 전적으로 평론가의 잘못으로 돌리기는 어렵다.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글의 가격이 폭락했기 때문이다. 포털에 주도권이 넘어가며 대중은 더 이상 돈을 내고 글을 사지 않는다. 활자 매체인 신문과 잡지로서는 위상이 떨어지고 퀄리티도 하락할 수밖에 없다. 매체는 광고와 어뷰징에 의존하며 소위 '기레기'를 양산했고 특히 잡지는 차례차례 폐간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자연히 음악평론 또한 직격타를 맞았다. 경영난에 시달리는 신문은 문화면에 대한 투자를 먼저 줄였고 음악잡지 역시 시장에서 많이 사라졌다. 하물며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지면의 대부분조차 홍보성 기사와 칼럼으로 채워지고 있다. 그런 글은 매체도 보도자료를 기반으로 쉽게 쓸 수 있어 편하고 기획사 역시 홍보에 도움이 되므로 좋아한다. 다시 말해 홍보성 글을 실어주며 취재원(기획사 등)을 관리하고 광고를 수주하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구도인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 음악계에서는 공연 리뷰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공연예술 시장의 규모가 한결 커졌음에도 공연을 되짚으며 논하는 리뷰는 도리어 희귀해지는 기형적인 현상이 나타났다. 글과 정보는 넘쳐나지만 그 대부분은 홍보를 전제로 한 것이다. 상품의 퀄리티를 평하고 의미를 찾아 시장에 알짜 정보를 계속해서 전할수 있는 가치 있는 리뷰는 드물다. 비유하자면 물건을 파는 데에만 주력하고 이후에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꼴이다.

 

이런 형국에서 평론가가 소신 있는 글을 쓰기란 쉽지 않다. 그에게 일감을 주는 매체와 기획사 모두 그런 글을 원하지 않는 게 현실이니 입바른 소리, 특히 공연 혹평은 애초 어려울 수밖에 없다. 작게는 펜대, 크게는 밥줄이 걸린 문제다. 넓게 보면 이는 한국 사회 전반에서 관찰되는 부분이니 특별히 평론가만을 싸잡아 비판하는 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음악 소비자 입장에선 퀄리티 높고 소신 있는 리뷰가 절실하다. 번지르르한 수사로 가득한 글이 아니라 음악 내외에서 의미를 찾아 지적하고 안내함으로써 질적 성장을 도모할 수 있는 그런 글 말이다. 사실 리뷰를 쓰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라이브로 한 번만 듣고 평가해야 하기에 쓸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인력이 한정적일 뿐더러 자신이 작성한 내용에 어느 정도의 책임을 져야 하므로 그에 따른 부담도 있다. 한국 특유의 배타적인 집단주의 문화에선 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 노고와 부담에 비해 주어지는 대가는 터무니없이 적다. 원고료는 쥐꼬리이고 짊어져야 할 짐은 많다. 그러니 쓸 유인이 없다

 

애호가 전문가 시대
하지만 근래 들어 SNS가 보편화하며 분위기가 바뀌는 흐름이다. 종전에 비해 애호가 집단의 연대가 한결 강해지고 정보 교류 또한 활발해졌다. 내 생각엔 페이스북에서 이런 현상이 특히 두드러진다.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에게 널리 퍼지는 포맷으로 긴 글을 제약 없이 쓸 수 있으며, 다른 무엇보다 신원을 드러내고 실명으로 소통하기 때문이다. 해서 일부는 언론, 음악가 등과도 교점을 가지며 이따금 파급력 있는 형태로 전파된다. 과거에도 몇몇 클래식 커뮤니티에서 여러 이야기가 오갔지만 그땐 그 안에만 머물렀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전방위적으로 전파되고 때로는 주류 언론이 그 이야기를 기사화하기도 한다.

업계에서 일하는 평론가와 달리 애호가는 대체로 자기 돈을 내고 표를 사서 음악회에 가는 입장이고 업계에 몸을 담지 않은 사람이 주축이다. 자연히 호평이든 혹평이든 자기 감상을 솔직히 말하는 데 거리낄 게 적다. 심지어 일부 애호가는 전문가 뺨치는, 때로는 능가하는 수준의 식견과 필력을 보여주며 나름의 구독자층을 형성하기도 한다. 당장 나만 해도 몇몇 애호가가 쓴 후기는 꼭 챙겨본다. 굉장한 애정을 가지고 섬세하게 감상을 공유하는 분들이어서 업계에서 프로로 통하는 평론가, 칼럼니스트보다 더욱 신뢰한다.

지면을 빌려 조심스레 밝히자면 나 또한 그런 포지션을 지향하는 축이다. 여러 매체에서 내가 쓴 음악 관련 글을 낼 때 칼럼니스트, 평론가 등의 직함을 박길 바랐지만 줄곧 고사해왔다. 업계 밖의 애호가 지위를 유지하며 쓰고 싶어서다. 그래서 소설가, 작가, 애호가 중 원하는 걸 택하라고 말한다. 연합뉴스TV기사에는 ‘소설가 겸 음악평론가’로 나갔는데 이는 내 의사에 반하는 것이다. 난 평론가가 아니니 그렇게 쓰지 말라고 통화에서 확실히 밝혔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좋은 이야기만 기록으로 남고 유통되는 시대는 이제 끝났다. 자기 돈을 내고 감상할 만큼 음악에 애정을 가진 애호가에게 펜이 쥐어졌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진 가장 큰 강점은 솔직함이고, 이는 기존의 한국 평단에 결여됐던 바로 그 미덕이다. 나는 이런 흐름이 앞으로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본다. 애호가가 평론가를 완전히 대체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보다는 두 주체가 서로를 보완하며 경계가 흐려진다는 의미에 가깝다.

수원시향 음악회에 대한 혹평도 공식 매체를 통해 나오지 않았다. 비판적인 이야기는 보도되지 않았으며 모 경기도 지방지의 기사는 도리어 찬사일색이었다. 기사 내용만 보면 황홀경에 취할 법한 환상적인 음악회였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었던 애호가, 평론가의 SNS를 통해 실제는 그게 아니었음이 알려졌다. 그리고 끝내 악단 내 갈등의 기폭제로 작용했다. (이 글을 쓰는 내도록 이 대목이 켕겨서 마음이 무겁다.)

분위기의 변화는 주류 언론에서도 관측된다. 최근 저명한 평론가 한 분이 심경의 변화를 고백했다. 늘 완화된 어조로, 때로는 들은 것과 달리 써온 걸 자성하며 이제는 다른 태도로 쓰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최근의 비평엔 비판적 내용도 근거를 갖춰 곁들여지고 있고 덕분에 몇 차례 발전적인 논의도 진행된 바 있다. 한 사람의 애호가로서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주류 언론에 비평을 싣는 사람이 그 결심을 실천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 때문이다. 그 세계에서만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사람이라면 더더욱.

 

이 글이 실리는 매체는 벅스 산하 그루버스가 운영하는 오디오 매거진 ‘하이파이스타일’이다. 정식 오픈 전의 필진 회동에 나도 참여했는데 그 자리에서도 위와 같은 이야기가 주축이었다. 당시 ‘눈치 보지 말고 부끄럽지 않은 글을 써보자’는 이야기에 많은 이가 공감했다. 그때 나는 내심 ‘다른 회사에 다니면서 글을 쓰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이 업계에서 글 쓰는 게 직업인 사람은 어렵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어떤 결과물이 탄생할지는 더 두고 볼 일이다. 기형적인 사회에서 글을 쓰는 모두에게 응원의 마음을 전하며 일단 나라도 잘 쓰는 수밖에.

 

글쓴이

  • 스무 살엔 음악을 하겠다고 비뚤어졌고 서른 살엔 글을 쓰겠다고 비뚤어졌다.
    <문학사상> 소설 부문 신인상으로 등단해 이런저런 글을 쓰며 살고 있다.
    음악 관련 글은 허핑턴포스트, 예술의전당, 서울시향 등에 주로 기고해왔다.
    순도 100% 마족인데 엄마도 마족인지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