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렌 굴드의 재래일까
  • 그동안 꿀띠쉐프(Miroslav Kultyshev)는 섬세함과 강력함의 중간에서 열심히 자신의 길을 찾고 있는다는 인상을 받았다. 잘치는 연주였지만 피터 도노호나 옵치니코프 같은 대가의 연주에 비해서는 뭔가 부족함이 있었다.

미로슬라브 꿀티쉐프 연주회  

 

그는 미쳤고, 나는 행복 했다.

 

그를 연주회에서 처음 본지도 벌써 10년 가까이 되었다. 그의 연주를 갈 때마다 참 열심히 연주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심을 다해 연주하는 그 열정은 언제나 강한 인상을 주었다.

개인적으로 연주회 뒷풀이에서 만난 그는 수줍음 많이 타는 앳된 청년이었다. 그 당시 이미 차이코프스키 콩쿨에 우승한지 한참 지난 뒤여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연주자였다. 부끄러운 듯 치킨 한조각에 미소띤 얼굴로 맥주를 음미하던 모습은 스타 연주자의 그 것 과는 거리가 한참 먼 모습이었다.



서로 못하는 영어로 개발새발 의사소통을 해보니, 그는 오로지 피아노와 음악에만 관심이 있는 연주자였다. 마치 세상과 동떨어진 채 구도에 정진하는 신부나 스님의 모습과 다를바 없었다. 먹는 것과 자는 것을 빼면 오로지 피아노에 대한 생각과 연습에 미친 순수한 청년이었다. 그래서 그의 연주는 언제나 신선하고 열의가 가득했다.

 

피아노라는 악기는 사실 외로운 악기다.

악기의 왕이라고는 하지만 오케스트라와의 협연도 사실 음색이 잘 어울리지 않아서 따로국밥 처럼 느껴지기 일쑤다. 대부분의 현악기가 피아노 반주를 바탕으로 연주하지만, 정작 피아노는 다른 악기의 반주없이 홀로 연주된다.

현악기가 다양한 음과 음사이의 중간음을 연주하거나 음이 끊어지지 않게 연주할 수 있는데 반해 피아노는 건반을 누르는 것 외엔 기교라고 부릴게 없다. 기껏 할수 있는 것이 페달을 이용해서 음의 강약과 여운을 조절 할수 있을 뿐이다.

물론 대가들은 건반을 누르는 힘이나 속도 심지어 건반에서 손가락을 떼는 것까지도 조절을 하지만 말이다. 분명한 것은 건반과 건반 사이의 중간음은 절대 낼수가 없다. 어떻든 피아노라는 악기는 주어진 건반을 단지 누를수 있을 뿐이다. 물론 어떤 타이밍에 얼마만 한 힘으로 어떨게 터치하느냐가 중요하긴 하지만 말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피아니스트가 있고, 다양한 피아니즘(피아노를 연주하는 기법)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코르토(Alfred Cortot)와 샹송 프랑수아(Samson Francois)로 대표되는 섬세하고 디테일을 추구하는 쪽과 박하우스(Wilhelm Backhaus)에서 가브릴로프(Saschko Gawriloff)나 리시차(Valentia Lisitsa)로 이어지는 다이나믹을 강조하는 쪽으로 대별된다.

한국인 최초의 쇼팽콩쿨 우승자인 조성진은 전자의 섬세함에 중심을 둔 연주 스타일이다. 그래서 조성진이 연주하는 쇼팽은 아주 좋지만 가브릴로프가 연주하는 쇼팽은 불편하기 그지 없다. 반대로 박하우스의 베토벤 피협 5번 황제는 강렬하지만, 조성진이 연주하는 황제는 아쉽고 허전하다.

 

대부분의 피아니스트는 섬세하거나 강력함이라는 이분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물론 리히테르(Sviatoslav Richter)나 에밀 길레스(Emil Gilels)처럼 음악의 내면을 스스로 깊게 추구하는 구도자의 길을 가는 연주자도 있다.

이런 경우를 빼고는 섬세함과 강력함을 겸비한 피아니스트는 찾아보기 힘들다. 찾아보면 있긴 하지만 일부러 찾아봐야 할 정도로 드물다. 실제로 섬세함과 강력함을 겸비했다고는 하지만 막상 들어보면 섬세함도 아니고 강력함도 아닌 중간의 어정쩡한 지점을 중심으로 연주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물론 독창적인 곡 해석에 따른 템포조절이나 터치의 특별함으로 승부를 거는 경우라고 하겠다.

 

그동안 꿀띠쉐프(Miroslav Kultyshev)는 섬세함과 강력함의 중간에서 열심히 자신의 길을 찾고 있는다는 인상을 받았다.

잘치는 연주였지만 피터 도노호나 옵치니코프 같은 대가의 연주에 비해서는 뭔가 부족함이 있었다. 연주회가 끝나면 느낌이 좋긴 한데 뭔가 2% 부족함이 느껴졌다. 무엇 때문에 그런지 딱 꼬집어 말할수는 없지만 말이다.

 

몇 번을 지켜본 터라 큰 기대는 하지 않고 5월14일의 연주를 들었다.

차이코프스키(Pytor Ilyich Tchaikkovsky)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들으면서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터치가 물흐르듯 자연스러워졌고 타건의 강약 조절이 훨씬 디테일 해졌다.

무엇보다 페달을 사용해서 음을 순간순간 조절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한마디로 내가 아는 꿀띠쉐프가 아니었다. 내공을 업그레이드해서 내앞에 나타난 것이다.

 

자연스럽게 5월 22일 연주가 기대가 되었다. 더구나 레파토리가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의 <페트루슈카(Petrushka)>와 차이코프스키의 무용곡 <호두까기 인형(The Nutcrucker)>으로 평소에 접하기 힘든 곡이니 더말할 나위가 없었다.

첫곡인 쇼팽의 프렐류드는 아주 나긋하면서 섬세하게 연주해 나갔다. 쇼팽 스페셜리스트라고 할순 없지만 쇼팽에 대한 나름의 해석으로 즐겁게 들었다.

 

이날 연주의 백미는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의 <페트루슈카> 였다.

사실 이곡은 대곡이자 난곡으로 어지간한 연주자들도 쉽게 연주 레파토리로 삼지 못한다. 템포도 빠르지만 변화무쌍하게 전개되는 곡의 특성 탓에 연주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푹풍처럼 몰아치다가 잠깐의 잔잔함이 나오고 다시 빠르게 몰아치는 템포가 이어진다. 신들린듯 치는 꿀띠쉐프를 보면서 곡에 완전히 몰입된 그를 느낄 수 있었다.

순간 미치지 않았나 싶었다. 웅얼거리는 소리만 있었다면 글렌 굴드(Glenn Gould)가 연상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실제로 소리는 안났지만 뭐라 입으로 말하는 듯한 모습을 볼수 있었다.

 

그가 <페트루슈카>에 몰입해서 연주하는 동안 나는 신기한 체험을 했다. 아니 콘서트 홀이 이렇게 작았나 싶을 정도로 작았다. 이건 분명 착시일 것이다. 익히 자주가서 훤히 알고있는 예술의 전당 코서트홀 인데 홀이다. 이 큰 홀이 작게 느껴지다니...

재미있는 것은 피아노는 반대로 더 커져서 홀 중앙에 떡하니 버티고 있으면서 공간 전체를 소리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피아노 한대로 콘서트 홀을 꽉 채우고 있는 듯한 착각이 <페트루슈카>를 듣는 동안 생겨났다.

 

무수히 많은 콘서트 홀에서 피아노 리사이틀을 들었다. 콘서트 홀에서 피아노 피아노 솔로는무리라는 생각을 했었다. 피아노는 콘서트 홀보다는 바로 옆의 훨씬 작은 크기의 리사이틀 홀이나 BK 쳄버홀에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었다. 콘서트 홀이 작아지고 피아노가 커져서 콘서트 홀을 채우는 듯한 느낌은 아주 신기했다. 

 

차이코프스키의 무용곡 <호두까기 인형>은 나의 기대가 너무 커서인지 <페트루슈카> 만큼 감동적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이 곡에서 오른손의 연주는 그동안 들었던 어느 연주에서보다 투명하고 깨끗하면서도 흐름이 아주 좋았다. 다만 오른손의 뛰어남에 비해 왼손의 터치는 상대적으로 약간 아쉬움이 있었다. 특히 우측의 댐퍼 페달(Damper Pedal)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울림을 매 순간 순간 조절하면서 곡 전체의 흐름을 디테일하게 이끌어가는 모습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좌측의 소프트 페달(Soft Pedal)은 쇼팽 곡 연주할 때 많이 사용되었는데, 꿀띠쉐프 자신이 느끼고 해석한 쇼팽을 들려주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것 같았다. 꿀띠쉐프 특유의 서정적이면서 나른한 느낌까지 들게하는 쇼팽은 소프트 페달의 역할이 컸다. 여지껏 많은 연주자의 연주를 봤지만 소프트 페달을 꿀띠쉐프 처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본적이 없는 것 같다.

전체적으로 꿀띠쉐프의 연주는 한사람이 연주하는 것이 아닌 다양한 인격의 사람이 필요할 때마다 나타나서 연주하는 것 같았다. 쇼팽 때는 아주 멜랑꼬리하면서도 몽환적인 성격의 연주자가 나왔다가 스트라빈스키 곡에서는 열정적인 연주자가 나타나서 거침없이 몰아치는 연주를 했다.

일관된 스타일의 연주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다소 낯설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아주 느리고 감성적인 인격과 폭풍처럼 몰아치는 인격이 곡에 따라 수시로 등장하는 것을 같은 연주에서 본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여지껏 그런 연주자의 실연을 본적이 없다. 대부분의 연주자들은 자신의 스타일로 일관되게 곡을 해석하고 그대로 연주를 했다.

적지않게 피아노 연주회를 다니면서 같은 피아노라도 연주자에 따라 피아노라는 악기가 갖는 느낌이나 표정이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경험은 여러차례 했다. 그런데 한사람의 연주회에서 피아노가 이렇게 다양한 표정을 가지는 것을 느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나른하다 못해 한없이 몽롱하다가도 갑자기 빠른 템포로 강렬하게 몰아치는 표정이 한 연주자에 의해서 동일 공간 안에서 가능하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다중인격이라고 불릴만큰 전혀 다른 성격의 연주가 곡에 따라서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가 그의 연주회에서 느낀 느낌에서 답을 찾자면 이렇게 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완벽한 음악에의 몰입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고 말이다.

시중일관 무엇인가에 깊이 빠진 듯한 그의 표정과 몸짓에서 괴팍한 피아니스트로 유명한 글렌굴드를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극도의 편협한 자기 세계 속에서 자신만의 음악을 추구했던 그의 연주 모습과 너무 흡사하기 때문이다.

연주회가 끝나고 한 노 신사가 '글렌굴드가 재래했다'라는 말을 했다. 이 표현이 과한 것이 아님은 그의 연주 모습을 본 사람은 알 것이다. 특히 근거리에서 그의 눈을 본 애호가는 제정신이 아닌것 같은 눈동자였다는 얘기도 나왔다.

 

리히테르(Sviatoslav Richter)의 연주 빼고는 피아노 연주회 중간에 살짝살짝 소름이 돋는 듯한 경험을 한 것도 처음이었다. 나도 모르게 일어서서 박수를 친 것도 그 많은 연주회 중에서 이번이 처음이었다.

일어서서 박수를 치다보니 내가 갔던 어떤 연주회보다 많은 사람이 서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는 연주하는 동안 미쳤던 것이 확실하다.

덕분에 들을 수 없는 연주와 음악을 들었다. 나는 더없이 행복했다.

 

글쓴이

  • 65년 서해안의 작은 섬에서 태어났고, 현재 한의사로 살고 있다.
    대학 시절 운명적으로 클래식과 오디오를 만나서 지금껏 지지고 볶으면서 지낸다.
    아날로그 오디오를 특히 좋아해서 관련 책도 몇권 냈다. 하이엔드와 빈티지 가리지 않는 오디오 박애주의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