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연재] ‘Rising Star’ 지휘자 편
  • 페트렌코는 1976년 쌍트 뻬제르부르크 태생이다. 유서 깊은 쌍트 뻬제르부르크 음악원을 졸업했고, 라빌 마르티노프(Ravil Martynov), 마리스 얀손스(Mariss Jansons), 유리 테미르카노프(Yuri Temirkanov)에게 지휘법을 사사했다.

Prologue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신춘문예 심사를 보던 구보씨가 자신의 행위를 병아리 감별에 비유하는 대목이 있다. 중앙출제위원회라는 집단이 출제하는 시험문제의 답을 맞추기 위해 수학마저 암기과목으로 여길 것을 강요받는 것을 교육이라고 믿고 있는 이들에게는 주관적인 감각에 의존하여 단 한 사람의 합격자를 결정하는 것을 용납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이 비유는 신인을 뽑는다는 행위를 통해 예술행위 전반의 고유함과 특수성의 핵심을 꿰뚫고 있으며, 미지의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첫 순간의 두근거림을 잘 전달해 준다.

 

클래식 음악은 '정체되어 있다'는 대중들의 편견을 반박하는 대표적인 존재들이 바로 이 햇병아리들이다. 이 장르에는 여전히, 아니 이제 살펴보겠지만 오히려 이전 세대들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다채로운 이력과 배경을 가진 젊은이들이 몇 백년 전의 음악들을 통해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이들에게 메세지를 전달하고 싶어하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궁극적으로 '우리 시대의 음악', 현대음악을 대중들에게 전파하는 일에 열정을 보인다.

 

여기에는 이제 갓 암컷인지 수컷인지를 판별받은 햇병아리도 있고, 여전히 젊은 예술가지만 경력상 중견 대접을 해줘야 할 이들도 있다. 이 음악가들의 녹음을 '젊은 예술가의 초상'으로 대한다면 클래식 음악이 정체된 예술이 아닌 대표적인 '오래된 미래'임을 깨닫게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지휘자’ 편

 

대표적인 '장수만세' 분야로 모든 직업군을 통털어 최상위에 위치하는 직업이 바로 지휘자다. 지휘라는 행위가 육체적으로 규칙적이고 끊임없는 신체의 움직임을 요구하며, 정신적으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롯이 자신의 뜻을 따르게 함으로써 만족을 준다는 점이 그 비결로 꼽히는데, 요즘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면 더 이상 통하지 않을 이야기다.

 

지휘자는 더 이상 자신의 견해를 오케스트라 단원에게 강요할 수 있는 독재자가 아니다. 2차 대전 전까지만 해도 지휘자들은 군대 수준의 복종을 단원에게 요구할 수 있었지만, 전후에 등장한 젊은 음악가들은 그런 문화를 전통으로 계승하기를 거부했다. 아바도를 필두로 한 젊은 지휘자들은 명령보다는 단원들과의 토론을 선호했고, 바로 그 아바도가 베를린 필 상임으로 취임함으로써 단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음악을 만들어 나가는 방식이 새로운 표준이 되어가고 있다. 야닉 네제-세갱이 이 새로운 표준의 충실한 이행자라면, 페트로프는 이전의 독재적 방식을 선호하는 이단아라고 할 수 있다.

 

바실리 페트렌코(Vasily Petrenko)


(사진제공 : 워너클래식)

페트렌코는 1976년 쌍트 뻬제르부르크 태생이다. 유서 깊은 쌍트 뻬제르부르크 음악원을 졸업했고, 라빌 마르티노프(Ravil Martynov), 마리스 얀손스(Mariss Jansons), 유리 테미르카노프(Yuri Temirkanov)에게 지휘법을 사사했다. 스승 목록에 한때 지휘계의 대표적 분더 킨트의 한 사람이던 에사 페카 살로넨(Esa-Pekka Salonen)이 있다는 사실에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는 팬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26살 때 ‘카다케스 오케스트라 지휘자 경연대회(Cadaqués Orchestra International Conducting Competition)’에서 우승한 페트렌코는 28살에 프로 지휘자의 길로 나섰고, 2005년 영국에서 2번째로 오래 된 악단인 로열 리버풀 필(Royal Liverpool Philharmonic Orchestra)의 상임지휘자로 취임했다. 아무리 능력을 증명하고 명성을 떨치더라도 다른 직업군에서는 한창 때인 30~50대를 상임 지휘자의 보조역으로 보좌하다가 60을 넘겨야 메이저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로 취임하는 것이 전례였음을 감안하면 파격이라고 하기조차 힘들 정도의 이른 선임이었다(베를린 필의 종신 상임 지휘자 카라얀이 81세로 서거하고 56세의 아바도가 뒤를 잇자 언론에서는 전례가 없는 '젊은' 지휘자의 승계라고 했을 정도였다).

 

2005년에 상임으로 취임, 이듬해에는 3년 연장계약을 한 페트렌코는 축구팀 리버풀 FC와 이 지역 출신 밴드 비틀즈에 이어 로열 리버풀 필을 국제적인 명성을 가진 도시의 명물로 만들었다. 러시아 태생답게 쇼스타코비치를 중심으로 러시아 작곡가들의 작품을 브람스나 영국 작곡가들의 작품처럼(영국 악계의 자국 작곡가들에 대한 다분히 편파적인 사랑은 악명이 드높다) 표준 레퍼토리로 삼은 페트렌코는 음반사 Naxos에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전집을 녹음하기 시작했고, 최근에 완결된 이 대장정은 우리 시대의 표준적인 해석이 될 것이라는 평단의 일관된 격찬을 받고 있다.

 

리버풀 FC의 열렬한 팬을 자처한 젊은 지휘자에게 오케스트라는 계약 기간을 2012년까지 연장한다고 발표하더니 2009년에 서둘러 2015년으로 다시금 연장했다.

2007년 4월에는 다른 영국 지휘자 7명과 함께 "21세기를 위한 뛰어난 오케스트라를 세우자"는 선언문에 서명했다. 이 선언은 영국 클래식 음악의 진흥을 위한 10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발표된 것으로 영국의 모든 초등학생들에게 클래식 음악회를 무료로 개방하자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젊은 세대의 클래식 음악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대중친화적인 태도를 명문화한 문서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나날이 명사가 되어가는 젊은 지휘자에게 리버풀 필은 급기야 2013년 그와의 계약기간을 특정하지 않겠다고 발표함으로써 사실상 페트렌코에게 종신 지휘자 자격을 부여했다. 심지어 페트렌코 자신이 오케스트라를 떠나기를 원할 때는 3년의 유예기간을 오케스트라에 주는 조건이 붙었다.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지만 나갈 때는 어림 없다'의 정확히 정반대의 지위를 보장받은 것이다.

2009년 3월, 리버풀 호프 대학교는 그에게 명예교수직과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했다. 다음 달에 시장이 주는 리버풀 명예시민 증서를 받은 페트렌코는 리버풀 FC의 트위터를 팔로우함으로써 이 도시에 영주하기 위한 모든 조건을 만족시켰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2번 & 15번

레이블: Naxos

녹음: 2011.6.14, 2010.10.26~27 영국 리버풀 필하모닉 홀

초기작과 마지막 교향곡을 커플링함으로써 작풍의 변화 뿐만 아니라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작곡가의 삶의 이력까지를 아울렀다. 클래식 음악 역사상 가장 완벽한 10대 작곡가의 작품이라고 평가받는 1번 교향곡을 쓴지 2년 후에 작곡된 2번 교향곡은 소비에트 혁명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작푸믕로 ‘10월에 바침’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악장 구분이 없는 단일 악장 작품이기 때문에 작품을 가르는 기준은 곡의 분위기다.

첫 번째 부분은 다양한 사건을 묘사하다가 정점에 이르러 작곡자 자신의 표현을 빌면 ‘초다성음악(Ultra Polyphony)’을 채택한 분주한 악구를 통해 혁명을 촉발한 노동자 시위를 환기시킨다. 두 번째 부분은 알렉산더 베지멘스키가 쓴 정치 선전 문구를 가사로 삼은 합창으로 되어 있는데, 당시 공장과 집단농장에서 부르던 ‘합동가요 mass songs’를 개작했기에 조성감이 아주 확고하다.

이렇게 첫 번째의 실험적인 면모와 두 번째의 대중친화적인 면모가 공존하는 작품의 성격에 걸맞게 1927년 11월 레닌그라드에서의 초연 후 평가 역시 둘로 갈렸다. 보수파들은 관현악 소리가 거슬린다고 불평을 늘어놓았고, 급진주의자들은 피날레 합창이 귀에 감기고 염원하는 투라며 작곡가를 공격했다.

 

페트렌코는 2번 1악장을 여는 큰 북의 트레몰로나 약음기를 낀 현악군의 불안감을 거의 폭발 직전까지 착실하게 증폭시킨다, 긴 호흡과 명료한 음조를 유지하는 트럼펫의 독주 등 페트렌코가 로열 리버풀 필하모닉을 인상적인 연주력을 지닌 연주집단으로 조련시켰음을 알게 해주는 대목들이 연이어 등장한다.

교향곡 15번은 작곡자의 교향곡 장르에 대한 마지막 봉헌물로, 이 장르가 20세기에도 서양 고전음악의 꽃으로 자리매김하는데 쇼스타코비치가 결정적인 공헌을 했음을 입증하는 대작이다. 악단의 기능적인 완성도를 바탕으로 한 페트렌코의 쇼스타코비치 해석은 전세대의 러시아 거장들과는 궤를 달리 한다. 작곡가의 마지막 교향곡인 15번이 특히 그런데, '빌헬름 텔'의 서곡이 인용되는 1악장의 즉물적인 스타일은 페트렌코가 완성한 쇼스타코비치 전집을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는 쓸모있는 샘플이 되어줄 것이다. 비탄과 분노가 끓어오르는 2악장은 페트렌코의 스타일에 맞춤옷처럼 어울린다. 첼로에게 원색적인 비브라토를 연주시키는 대목은 작곡가 특유의 냉소적인 작품세계를 각인시키는데, 한 번 들으면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1번, 교향시 <로스티스라프 왕자>

레이블: Warner Classics

녹음: 2013.8.20 영국 로열 리버풀 필하모닉 홀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전집만한 대중적 반향을 불러 일으키지는 못했지만 비평가들 사이에서는 못지 않은 열띤 반응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라흐마니노프 관현악곡집의 세 번째 음반.

교향곡 1번은 작곡가를 신경쇠약에 시달리게 할 정도의 처절한 실패, 최면술사이자 의사인 니콜라이 달의 심리치료와 자신감을 회복하고 다시 작곡에 전념한 라흐마니노프가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작곡하여 달 박사에게 헌정한 해피엔딩이 널리 알려짐으로써 모두 네 곡의 교향곡을 작곡한 라흐마니노프의 첫 번째 교향곡은 불후의 명작인 두 번째 피아노 협주곡의 탄생을 극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한 장치처럼 취급되곤 한다.

그러나 작곡가의 창작 이력에서 첫 번째 절정기에 씌여진 교향곡 1번은 그런 취급을 받을 정도로 형편없는 작품이 아니지만 작곡자 자신부터가 홀대의 선봉에 섰다. 초연의 실패에 너무나 낙심한 나머지 라흐마니노프는 악보를 전부 거둬버려 작품의 초고는 지금도 소재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나중에 이 작품을 피아노 2중주로 편곡하기도 했지만 적어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작곡하기 전까지, 아니 한참 후까지 작곡가는 이 작품을 꼴도 보기 싫었던 모양이다.

페트렌코는 2악장과 3악장에서 명백하게 드러나는 차이코프스키의 영향과 종악장에서 드러나는 작곡가 자신의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개성을 이음새를 거의 느낄 수 없이 연결시킨다. 쇼스타코비치에서는 현의 울림을 극도로 절제시켰던 페트렌코는 악상에 걸맞게 로열 리버필의 현악 주자들에게 노래 부를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한다.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2번의 3악장의 물결치듯 일렁이는 현의 음형을 사랑하는 이라면 작곡자가 자신의 교향곡 작곡 여정의 제 일보에서 오히려 훨씬 더 절제된 기쁨을 표현하는 흥미로운 대목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A. 톨스토이의 발라드 <로스티스라프 왕자>에 바탕을 둔 교향시는 재평가를 받고 있는 1번 교향곡에 비해서는 여전히 그 평가가 박하다. 이 곡은 작곡자이자 피아니스트, 지휘자였던 아렌스키(Anton Spetanovich Arensky)에게 헌정되었는데 여러 모로 자신과 닮아 있는 스승에게 라흐마니노프는 교향곡 1번과 함께 이 작품을 헌정했다. 이 곡 역시 이후에 작곡된 <바위>나 <죽음의 섬>같은 걸작의 반열에 올라 있지는 못하지만 작곡가 특유의 깊은 맛이 갓 발효되기 시작한 매력적인 작품으로 페트렌코의 신선한 접근이 듣는 이를 친절하게 안내해 준다.

 


(사진제공 : 유니버셜뮤직)

 

 

야닉 네제 세겡(Yannick Nézet-Séguin)

 

10대 소년의 꿈은 대개 이루어지기는 커녕 자라면서 폐기처분 되기 쉽다. 하지만 캐나다 몬트리올 태생의 야닉 네제-세겡은 딱 10살 때 지휘자가 되기로 했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퀘벡 음악원에 재학하면서 피아노, 실내악, 합창지휘, 오케스트라 지휘, 작곡 등을 배워나갔던 것도 장차 지휘자가 되었을 때를 대비한 것이었다. 1994년 그는 드디어 지휘자가 되는데, 다만 오케스트라가 아니라 몬트리올 폴리포닉 합창단의 음악감독을 맡게 된다. 하지만  네제-세갱은 결코 실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 때의 경험은 훗날 그가 오페라 극장의 총아로 군림하는 밑거름이 되어 주었다.

네제-세갱은 같은 해에 평소 선망하던 지휘자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를 만나게 된다. 그의 경력을 말할 때 네제-세갱이 줄리니에게 배웠다고 기술되곤 하는데 둘의 관계는 일반적인 사제의 그것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1년 여 동안 줄리니의 콘서트에 동행하면서 리허설과 콘서트에 참여한 경험은 사사라기보다는 사숙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래서 네제-세갱은 줄리니의 음악적인 능력 뿐만 아니라 인격적인 면에도 늘 잊지 않고 존경을 표한다.

지휘자로서의 경력은 2000년 그랜드 몬트리올 메트로폴리탄 오케스트라의 예술단장 겸 상임지휘자에 선임되면서 시작되는데 그는 아직도 이 자리를 놓지 않고 있다. 같은 해 처음으로 오페라를 지휘한 네제-세갱은 2004년 툴루즈 카피톨 국립 오케스트라와의 유럽 데뷔 공연은 평단과 관객 모두에게서 격찬 받았고, 같은 시즌에 무려 일곱 개의 오케스트라의 포디움에 서서 데뷔공연을 가지게 된다.

  

2005년 데뷔 무대를 가졌던 로테르담 필에 200/9년 시즌에 상임 지휘자로 취임하면서 처음으로 메이저 오케스트라의 수장 자리에 오른 네제-세갱은 2012/13 시즌부터는 필라델피아의 상임 지휘자에, 2016년에는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음악 감독으로 취임했다.

LA에 자리잡은 두다멜 정도를 제외하면 네제-세갱의 욱일승천하는 기세에 견줄만한 현역 지휘자는 찾기 힘들 지경이다.

 

콘서트와 오페라 모두에 능하다는 점에서 전세대의 거장들을 연상시키는 네제-세겡이지만, 1975년 생이니 30대에 앞서 살펴 본 지위를 손에 얻고, 고전음악계에서는 변방이랄 수 있는 캐나다 태생에 남자 애인과 17년째 동거 중이라는 사생활까지. 그는 달라진 클래식 음악계의 지형도를 상징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슈만 : 교향곡 전집

유럽 챔버 오케스트라

레이블: DG(Deutsche Grammophon)

녹음 : 2012.11 파리

챔버 오케스트라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이미 해석의 방향을 짐작할 수 있다. 예상대로 세부 하나하나까지 지휘자가 통제하면서 변덕스럽다고까지 이야기 되는 슈만의 악상에 악단이 빠르게 반응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신세대의 환호와 유장한 흐름을 느긋이 즐기는 올드 팬들의 못마땅함을 동시에 야기하는 호불호가 극심하게 갈리는 연주. 심리적인 흐름의 양상이 다채롭게 진행된다기 보다는 음향이 다이내믹해지는 현상적인 차원에 머무르는 대목이 잦다는 점이 걸리지만(특히 4번 교향곡이 그렇다) 금관의 사용법 만큼은 소리의 물리적인 성격을 음악 내적인 드라마로 승화시켰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듯. 명료하고 낭창하게 울려 퍼지는 금관악기군은 곡의 윤곽과 드라마의 흐름을 또렷하게 가져가는 효과를 자아내고, 자칫 난삽하기 쉬운 슈만의 교향곡을 대단히 알기 쉽게 들려준다. 같은 노선을 취한 래틀-베를린 필과보다 더 환영받은 것도 당연하다.

실황임에도 적당한 라이브감을 머금고 있을 뿐 어수선한 구석이 전혀 없는 매끈하고 정숙한 녹음. 연주와 녹음 모두에서 요즘의 경향을 잘 보여주므로 취향이 아니더라도 한 번쯤 들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스트라빈스키 : 봄의 제전/바흐 : 편곡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레이블: DG(Deutsche Grammophon

녹음 2013. 03 필라델피아 킴멜 센터

음반 커버의 작곡자 스트라빈스키 바로 아래에 스토코프스키의 이름을 배치해 놓음으로써 <봄의 제전> 초연 100주년 기념과 지휘자의 필라델피아 입성을 동시에 기념하려는 의도가 드러난다. 디즈니의 기념비적인 애니메이션 <환타지아>의 O.S.T를 맡았던 위대한 전임자의 바흐 편곡물을 잔뜩 배치해 놓은 걸 보면 후자쪽에 더 무게가 실리는 혐의를 거두기 힘들어지지만.

네제-세갱을 오늘날 오페라 극장의 총아로 만든 롤러 코스터 같은 완급 조절이 여기서도 펼쳐지지만 <봄의 제전>에서는 지나치게 계산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바순 주자의 오케스트라 입단 테스트에서 가장 선호되는 이 곡의 서두를 열어젖히는 필라델피아의 바순은 전임자 에센바흐와 함께 마이너 레이블을 전전했던 이 굴지의 오케스트라가 메이저로 복귀할 만한 충분한 저력을 지녔음을 증명하지만 말이다.

 

위대한 전임자 스토코프스키가 편곡한 바흐의 오케스트라 편곡물에서도 네제-세갱의 색깔이 강하게 입혀져 있다. 거의 실내악적이기까지 한 텍스춰에 대한 집중은 스토코프스키의 화려하고 요란한 그래서 흑암과도 같이 강건했던 연주와 정반대 자리에 있다. 쌓아올린 음의 구조물로 듣는 이를 압도하기 보다는 아찔한 템포 변화로 흐름을 조절하는 네제-세갱의 방식은 ‘현대의 청중들에게 바흐를 알기 쉽게 소개한다’는 스토코프스키의 편곡 의도를 관철시키는 매력적인 시도다.

대편성 오케스트라가 거의 야만적으로 음을 방사해내는 데도 육중한 울림이 없는, 보기 드문 음이 담겨져 있으므로 재생에는 무엇보다 시스템의 기민성에 신경을 써야 한다. 스피드가 느린 시스템에서라면 이 음반의 묘미를 100% 만끽하는 것은 불가능한 임무가 될테니.

 

 

글쓴이

  • ‘코다’, ‘조이클래식’, ‘스테레오 파일’, ‘월간 오디오’, ‘출판 저널’ 등의 월간지에 고정 필자로 활약해 왔으며, 삼성생명 및 기업 중역들을 위한 인문학 강의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결합한 세미나 및 대중강연으로 평단과 연단에 공히 이름을 알려왔다. 클래식 객원기자로 중앙일보에서 활동했으며, 최근에는 멀티음악공간 ‘스트라디움’ 에서 음악 강연을 해왔다. 저서로 <내가 좋아하는 클래식 음반>(공저)이 있다.